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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의 '실종'과 법의 무지-3

김동현 문학평론가/책임에디터

2021년 5월 5일

대한민국과 인민공화국이 아닌 '나라'를 꿈꾸었던 당대의 열망들

사진설명: 1946년 8월 13일자 동아일보. 당시 여론조사 결과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좌우의 개념과 다른 결과를 보여준다

순수했던, 너무나 순수했던 폭력 5.18

5.18을 다룬 영화를 볼 때마다 눈길이 가는 장면이 있다. 체육관 바닥을 가득 메운 수많은 관과 그 관을 둘러싼 태극기, 그리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둘러선 사람들의 표정. 영화 ‘택시운전사’와 ‘화려한 휴가’ 모두 비슷한 장면이 등장한다. 태극기로 감싼 죽음들은 광주의 비극성과 전두환을 수괴로 한 반란군의 불법성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김상봉은 광주의 시민들이 “집요하게 태극기와 애국가를 수호하려 했다”면서 이를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주권을 정당하게 표현하고 실현”하려는 것이었다고 평가한다.1) 폭력의 의미를 되물으면서 그는 광주 시민군들이야말로 정상 국가의 예외 상태에서 발현된 ‘순수한 주권 폭력’이었다고 말한다.2)

김상봉이 지적하고 있듯이 태극기가 감싸고 있는 죽음들은 1980년 광주의 성격을 정확히 보여준다. 반란군에 맞서 대한민국의 주권자로 분연히 일어난 의로운 항쟁. 광주는 반란군의 폭력에 저항한 80년의 외로운 섬이자, 정의의 실현 지대였다. 죽을 것을 알면서도 도청 잔류를 결정한 시민군들은 죽음으로서 예외적 폭력에 맞서고자 한 의로운 항쟁이었다. 하지만 제주 4·3으로 시선을 옮겨오면 사정은 간단치 않다.

광주의 5월이 대한민국의 예외 지대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정의의 선택이었다면 제주의 사월은 해방 후 텅 비어 있는 국가-정체(政體)를 스스로 규정하려는 불꽃이었다. 광주는 반란군에 맞서 대한민국의 정상성을 회복하고자 했다. 제주의 선택은 광주가 지키고자 했던 ‘대한민국’이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국가의 정체를 누가 정해야 하는 것인지를 묻는 근원적 질문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에서 도대체 무엇을 선택했어야 하는가’라고 되물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질문은 사후적 결과를 원인으로 오인하는 것이다. 1946년 미군정이 실시한 여론조사결과는 ‘나라 만들기’라는 민족적 과제 앞에서 당대의 민중들이 어떤 선택지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7월에 실시된 여론조사 결과 85%가 정치 체제로 대의제도를, 70%가 경제 체제로 사회주의를 선택했다.3) 지금의 시각에서 보자면 대의민주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조합을 선뜻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선택은 당대 민중이 현재의 좌우의 개념과 다른 의미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이 좌파적 입장을 옹호하든, 우파적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든, 이는 당대 민중들의 정치적 지향이 무엇이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해방기 민중들이 정치적으로는 우파적 대의민주주의와 경제적으로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지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4)

반쪽 짜리 '대한민국',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을 거부했던 몸짓

해방기의 당대적 욕망은 수많은 정치 참여의 행위로 표출되었다. 해방기 좌우의 대립을 혼란이라고 뭉뚱그려 말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 것인가. 봉건 전제 군주 국가였던 조선의 패망 이후 단 한번도 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실현해 보지 못했음에도(임시정부의 존재에 대해서는 논외로 해두자)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적 경제 체제를 선택했던 민중들의 열망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그것은 대한민국과 다른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다른 ‘공화국’을 꿈꾸었던 정치적 열망의 표현이었다. 광주의 주검을 감쌌던 태극기를 제주 4·3의 주검에 적용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나라 만들기’는 결국 국가 정체(政體)의 선택과 맞닿아있다.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에 제주는 과연 무슨 답을 내놓으려고 했던 것일까. 『제주도인민들의 4·3 무장투쟁사』를 썼던 김민주는 제주 MBC와 한 인터뷰에서 그것을 ‘인민의 나라’라는 말로 표현했다.5) 오해하지 말자. 그가 말하는 인민이라는 개념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인민’이 아니다. ‘People’의 적확한 번역어이자, ‘시민’, 혹은 ‘국민’(국민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재론할 필요가 있지만 여기에서는 논의의 필요에 의해 그대로 쓰기로 한다)이라는 뜻이다. ‘민주주의’(Democracy)가 ‘Demos’(인민)의 ‘Cracy’(지배)를 의미한다고 할 때 그가 말하는 ‘인민의 나라’는 민주주의적 정치체제를 실현하고자 하는 정치적 상상의 표현이다.

대의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되는 요즘에 비춰본다면 그들의 선택은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창안하기 위한 실천적 폭력이었다. 이때의 폭력은 벤야민식으로 말하자면 새로운 법을 정립하고자 하는 노력인 동시에 텅 빈 해방의 시공간을 민주의 함성으로 채우고자 했던 혁명의 시작이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혁명도 아니고, 부르주아 혁명도 아닌, 모호하지만 무거운 의무로 다가왔던 새로운 나라,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진정한 시민적 혁명의 출발이었다.

광주를 한국 민주주의 운동의 절대 순수였다고 평가하는 김상봉도 광주의 시민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려 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광주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5.18 초기 항쟁을 이끌었던 전춘심을 간첩으로 오인해 계엄군에게 넘겨버린 일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6)공산주의자라는 오인을 벗기 위해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이를 고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시민들의 행동을 무조건 비난할 수 있을 것인가. 반란군의 폭력성에 맞서기 위한 시민들 스스로 시험에 빠지고 만 것이 광주의 비극성이라고 한다면 이것을 어찌 시민들의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이 장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광주의 정신이 대한민국의 비정상성을 정상으로 만들고자 했던 순수한 열정이었음에도 그것이 대한민국이라는 체제 안에서 작동하는 정상성의 발현이라는 점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법 이전 법, 법 이후의 법

정상국가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반란군의 폭력과 맞서 싸웠던 광주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의 정점에 서 있을 수 있는 이유도 그것이 대한민국이라는 ‘법-체제’ 내부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왜곡된 법을 바로잡으려는 시민적 저항이었다. 하지만 광주와 달리 제주에서는 정상성으로 되돌려야 하는 ‘법-체제’가 존재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단독 정부는 수립되기 이전이었고, ‘제국-일본’의 권력은 미군정이 승계하였다. 새로운 법이 만들어지기 전이었고, 새롭게 만들어진 법은 제주를 배반했다. 해방기를 규명하는 작업이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법’ 이전의 법과 ‘법’ 이후의 법 사이, 제주의 사월은 바로 그 사이에서 여전히 법의 외부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제주의 사월은 증언될 수 없는 목소리,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였다. 침묵의 외부에 존재하는 사실들을 들여다보았던 수많은 작업들은 그것이 대한민국이 기억하지 않는 기억들을 만나는 일이었다. 국가가 기억하지 않지만 제주 사람들은 선명하게 기억하는 수많은 일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수많은 죽음들을 말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노력 때문이었다. 제주 4·3을 기억투쟁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억 투쟁은 국가와 지역사이에서 존재하는 기억의 차이를 인식하는 일이었고, 국가의 언어에 지역의 언어로 말하는 응전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법으로 말해질 수 없는 것, 법으로도 말할 수 없는 사실들이 과연 사라졌는가. 사월 어김없이 꽃은 피고 진다. 꽃의 만개는 낙화의 시작이다. 특별법 개정에 던지는 환호와 박수 소리는 어떤 낙화의 시작인 것인가. 죄가 없는 것인가, 아니면 죄가 아닌 것인가. 그리고 누가 죄를 규정하는가. 우리는 묻고 또 물어야 한다. 법이 알고 있는 것은 법뿐이다. 정의는 법을 초월한다. 법을 정초하고 집행하는 힘이 무엇인지, 법의 이름이 누구의 입에서 말해지고 있는지를 묻지 않고 정의를 말하는 것은 법의 함정에 갇히는 결과를 초래한다. 법이 알지 못하는 기억들, 법이 알 수 없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있는 것일까. 오늘의 만세에 쉽게 동의하지 못하는 이유다.

<참고>

1)김상봉, 「국가와 폭력」, 『철학의 헌정-5.18을 생각함』, 길, 2015, 162쪽.

2)같은 책, 189쪽.

3)동아일보, 1946. 8.13.

4)박명수, 「1946년 미군정의 여론조사에 나타난 한국인의 사회인식」, 『한국정치외교사논총』 제40집 1호, 2017, 66쪽.

5)제주 MBC 제주 4·3 음악 다큐 ‘산, 들, 바다의 노래’(연출 권혁태), 2014.

6)김상봉, 위의 글, 163쪽.

출처 : 제주투데이 http://www.ijeju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225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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