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현 문학평론가/책임에디터
2021년 5월 4일
심방의 죽음, 그리고 상실되어 버린 주권
3.1절 발포사건의 첫번째 희생자는 심방
1947년 3.1절 발포사건의 희생자는 모두 6명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첫 희생자로 지목된 이가 심방이었다는 사실이다.1) 이날 경찰의 강경진압이 3.10 총파업으로 이어지고, 이듬해 4월 3일 항쟁이 됐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3.1절 기념식의 첫 번째 희생자가 “무속하는 사람”, 심방이었다는 사실은 우연치고는 기이하다.
제주 4·3항쟁이 비극적인 대학살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던 데는 많은 이유가 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미군정의 존재였다. 해방기에 대한 많은 연구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해방은 또 다른 점령의 시작이었다. 딘 러스크와 찰스 본스틸, 이 두 명의 미국 장교가 내셔널지오그래픽의 지도를 보면서 38선이라는 아이디어를 낸 이래로 한반도는 미소 냉전 체제 대결의 최전선이 되었다. 1945년 9월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정의 책임자는 ‘뛰어난 야전 사령관’이었던 하지 중장이었다. 복잡한 한반도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정무 감각’보다는 미국의 이익과 군사 전략을 중요시했던 하지는 조선에 대한 이해가 전무했다. 미국이 해방된 조선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던 몽양 여운형 대신 이승만을 정치적 동반자로 선택한 이유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둘러싼 좌우의 대립과 1946년 5월의 정판사 위폐 사건과 10월 대구 항쟁, 그리고 1948년 4월에 이르는 기간은 남한 지배를 위한 미군정의 전략이 증폭되는 과정이었다. 제주 4·3 항쟁과 이후 벌어진 대학살의 문제에서 미군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몽양 여운형의 주도로 만들어진 조선인민공화국의 등장에서 알 수 있듯이(인공의 역사적 오류에 관한 논쟁은 잠시 제외하더라도) 해방이라는 역사적 시간은 일본 식민지 지배 이후 새로운 주권을 선언하기 위한 민중적 쟁투의 시작이었다. 해방 이후 수없이 만들어진 정당들과 각종 단체들의 등장을 ‘난립’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당대적 욕망의 발현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해방, 우리의 손으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자 했던 역동적 시간
해방기의 당대적 욕망은 ‘나라 만들기’이었다. 그것은 35년간 조선을 지배한 ‘제국 일본’의 권력을 대신할 새로운 주권의 성립을 위한 열망이었다. 1945년 9월 9일 조선총독부 청사에서 일장기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게양되는 순간을 전한 매일신보의 기사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기사는 “우리들의 자유와 의사를 압박하여 오던 제국주의 간판은 여지없이 땅에 떨어진 것”이라면서 “우리들은 하루빨리 저 깃대에 성조기 대신 우리들의 국기가 자유롭게 휘날릴 날이 실현되도록 힘을 합쳐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2) 일장기도 아니고, 성조기도 아닌 새로운 깃발에 대한 염원. 그것은 ‘나라 만들기’를 둘러싼 좌우의 대립이 깃발의 대결이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태극기와 인공기의 대결이 아니었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립도 아니었다. ‘단선 단정 반대’라는 구호가 징후적으로 보여주듯, 그것은 조각난 깃발을 거부하는 함성이었다. 그 함성의 기원에 제주 4·3 항쟁이 맞닿아 있다.
해방기를 주권의 성립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제주 4·3은 제주라는 지역에 한정된 우연하고 비극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해방이라는 시공간을 관통하는 결정적 순간이자, 주권자가 누구인지, 주권은 어떻게 행사되어야 하는지를 좌우하는 역사적 결정이었다. 벤야민의 견해를 빌려 말하자면 그것은 법의 이름을 선포하는 새로운 법의 창안이자, 발견의 순간이었다. 일장기와 성조기를 거부하고, “우리들의 국기”를 선택하려는 혁명의 시간이었다. 제주 4·3이 문제적 이유도 여기에 있다.
흔히 말하는 제주 4·3 정신의 본질은 이러한 혁명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나 아렌트 가 『혁명론』에서 혁명을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한 것처럼, 제주 4·3은 식민지 이후 조선의 땅에서, 조선인의 손으로, 조선인의 새로운 시작을 만들고자 한, 새로운 시작의 선언이었다.
무엇이 4.3 정신인가
1947년 3월 1일 심방의 죽음이 예사롭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혁명이 새로운 정치적 시작이 될 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법으로부터 해방된 절대권력”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 그날 관덕정 광장으로 향했던 민중들의 행렬은 일장기와 성조기가 부여한 법의 이름을 거부했다. 그것은 해방된 땅에서 인민의 이름으로 새로운 법을 선포하고자 하는 역동이었다. 조천중학원에서, 하귀중학원에서, 중문과 대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3.1절을 기념하기 위해 모였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거짓 선동의 꼬임에 빠진 군중의 이합집산이 아니었다.
그날 사람들을 향해 발사된 총알은 인민 주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총성이었다. 심방의 가슴을 뚫은 총알은 제주의 함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하나의 상징이자, “관권의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던 제주의 역사를 겨냥한 것이었다. 오랜 제주 4·3의 진상규명운동의 역사는 빼앗긴 주권을 복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김석범이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서울정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몸부림이었다. 김석범은 『화산도』에서 이방근의 입을 빌어 서청의 증오가 “서울정권의 주변 지역에 대한 차별에 의해 이용당하고 증폭되는 있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3)
‘반공국가 건설’은 인민 주권을 거부하기 위한 변명이 되었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은 ‘남북 협상’과 ‘통일 독립 정부 수립’이라는 당대적 욕망을 짓밟은 결과였다. 남북 모두에 의해 거부된 ‘통일’이 미국과 소련, 그리고 남북의 권력을 잡은 이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폄훼되었음은 해방기의 역사가 잘 보여주고 있다. 분단 체제의 쌍생아가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단선 단정 반대’를 외치며 인민의 힘으로 새로운 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정치적 상상이 용인될 리 만무하다.
제주 4·3은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법의 선포와 법의 정립을 둘러싼 대결이었다. 이러한 대결의 국면을 현기영은 「마지막 테우리」에서 “법을 거스르고 해변에 맞서 일어난”, “초원”이었다고 말하고 있다.4) 초원이 “해변의 법으로부터 비켜난 곳”이 되어버렸다고 말하는 것은 초원에 ‘해변의 법’을 새겨 넣는 것이 아니라 ‘해변의 법’으로 말할 수 없는 ‘초원의 법’, ‘초원의 질서’의 복원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제주 4·3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제주는 오랜 시절 초원의 질서를 유지해왔다. 무속은 이러한 제주의 공동체적 질서를 지탱해 온 중요한 요소였다. 침묵을 강요받았던 시절, 제주의 굿은 증언의 재현과 해원의 가능성을 수행해왔다. 그것은 무속의 힘으로 국가의 폭력에 저항하는 힘의 분출이었다. 가장 제주적인 방식으로 침묵을 거부하는 제주의 울음이었다. 김성례는 이를 “단순한 사건의 사실적 기억마저 금지된 상황에서 그 시국의 음울함과 억울한 정서를 말로 표명하는 "영게울림"은 분명히 반국가적 행위”였다고 분석한 바 있다.5) 관덕정 광장에서 쓰러졌던 심방의 죽음이 예사롭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법-제도’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승인 받으려는 인정 욕망이 아니라 제주의 힘으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자 했던 법의 발견, 그 시작을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마지막 기사 이어집니다>
- 참고 -
1)4·3연구소, 『이제사 말햄수다』, 한울, 1989, 26쪽. 이 책의 첫 증언은 「4·3 내력굿」인데, 증언자 역시 심방이다. 증언자는 4·3 내력굿을 하면서 겪었던 이야기를 풀어놓으면서 3.1 발포사건 첫 희생자로 양씨를 지목하고 있다. “맨 처음 죽은 이가 양○경이라고 중대굴(주: 오라 3동에 속한 마을) 곱새로 지레 호꼬만헌 사름이라. 우리 무속허는 사람이주.” 증언자는 희생자의 이름을 ‘양○경’이라고 기억하고 있으나 제주 4·3 진상조사보고서에는 이름이 양무봉으로 나와 있다. 『제주 4·3 진상조사보고서』, 109쪽. 당시 희생자는 양 씨를 포함해 허두용(15세), 김태진(38세), 송덕수(49세), 박재옥(21세), 오문수(34세) 등 모두 6명이다.
2)‘하강된 일본 국기-9일 오후 4시 이후로 종언’, 매일신보, 1945. 9. 11.
3)김석범, 김환기, 김학동 옮김, 『화산도』 11권, 보고사, 2015, 233~234쪽.
4)현기영, 『마지막 테우리』, 창비, 1994. 소설 속 대목은 다음과 같다. “그랬다. 그들이 있으므로 초원은 아직도 세월 밖에 존재하고 해변의 법으로부터 비켜난 곳이었다. 노인은 불현 듯 격정에 사로잡혀 턱수염을 잡아당겼다. 사십오년 전, 초원은 법을 거스르고 해변에 맞서 일어난 곳이었다. 오름마다 봉화가 오르고 투쟁이 있었다. 한밤중에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노인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듣던 총각은 그 대목에서 격정에 치받힌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보게 , 안 그런가 말이여. 나라를 세우려면 통일정부를 세워야지, 단독정부가 웬말인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여 섬백성들이 투표날 초원으로 올라와버렸고, 그래서 초원은 여기저기 때 아닌 우마시장이 선 것처럼 마소와 사람들이 어울려 흥청거리지 않았던가. 그러나 법을 쥔 자들의 보복은 실로 무자비했다."
5)김성례, 「제주 무속: 폭력의 역사적 담론」, 『종교신학연구』 제4호, 1991, 21쪽.
출처 : 제주투데이 http://www.ijeju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225322